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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직접행동 청소년

빛글 5월 장애인 친구가 있냐고 묻는다면 - 글쓴이 반달



0.

내게 장애인 친구는 없나? 마치 내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휠체어를 타고 지내는 친구가 없다고, 장애인 친구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평생 치료가 아닌 관리 수준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친구가 있고, 오래도록 치료 중인 친구도 떠올려보지만, 병이 있으니까 장애인 친구인가? 친구로 지내며 ‘장애’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도 않지만, 그가 안고 있는 병을 헤아리며 먹는 것이나 함께 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일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친구 중에 중증 장애인은 아직 없다. 만난다면, 친구가 된다면 불편이 적지는 않겠지, 서툴고 부족한 내가 어쩔 줄을 모르느라고.

장애는 뭐고 장애인은 뭐람?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하는 걸까? 장애를 갖고 있으면 장애인이라고 하겠지? 팔이든 다리든, 눈이든, 머리든 어디가 얼마나 온전해야 혹은 얼마나 온전하지 않아야 장애인이라고 하는 걸까?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야 나 역시 온전치 못하다. ‘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세상이 나에게 붙이지 않을 뿐. 나는 무에 그리 장애라고 할 것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던가, 내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까닭을 헤아려보는 생각은 시작부터 덜그럭 거린다.

장애가 뭘까, 살면서 겪는 장애는 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누군들 없겠나 하는 생각을 하니, ‘장애인’이라고 따로 부르는 이들이 격리되고 멀리 떨어져 지내며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게 된 이유는 바로 저 따옴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장애의 정도, 불편의 정도를 나누면 그에 따라 얼마나 멀리 떼어 놓기로 정하는가? 또, 누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세상의 이야기들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따라오는 까닭은 나를 장애인이라고 세상이 부르지 않는다 해도 내게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온전치 않다. 온전함은 꿈에서나 바랄 수 있는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생애는 그랬다.

1.

아이를 낳아 길러 본 경험이 가르쳐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태어나면 ‘호모 사피엔스’ 종이 그렇다고 하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울어서 누군가를 불러야만 한다. 존재만으로 커다란 기쁨을 준다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지만.

나의 온전하지 못함을 처음, 받아들이고 보살피고 곁에 있어 준 건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어미 노릇을 하며 반복했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아기. 나는 그의 곤란함, 어떤 불능을 받아들이고 보살피며 내 일상의 불편이 생기는 것도 참아내고 곁에 있으며 가족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게 닥친 건 숱한 나의 불능들로 불편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고 영어로 말하는 사람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하고 무거운 건 들 수가 없고 길을 못 찾고 당황하며, 눈이 안 보여 대신 읽어줘야 한다. 한 때 아기였던 그는 지금 나의 온전치 못함을 받아들이고 답답함을 참아내며 곁에 있고, 가족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와 나는 생을 주고받고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를 누가 온전한지 온전하지 않은지 갈라놓을 이유는 없다.

2.

핏덩이, 살덩이인 나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인 어머니는 점점 더 온전치 못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이 돌아가고 팔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다리는 힘이 없었다. 고집부리고 투정하고 아프고 입맛 없어 하고 외로워하고 끝내 드러누워야 했다. 목욕을 시켜주어야 했고 부축을 해야 했고, 끝내는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온전하지 못한 몸과 마음, 일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재만으로 우리의 보금자리였고 그늘이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눈도 뜨지 못한 채 기운 없이 누워있으면서도, 먼 길 떠난 손주를 걱정하고 또 먼 길 떠나는 딸을 염려했다. 그의 온전하지 못한 일상과 비교할 수 있는 나의 온전함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슬픈 건, 그의 부재다.

3.

이제 5년을 넘기며 친구로 지내는 그이는, 밤에 잘 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확실하지 않은 원인으로 인해 점점 더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을 갖고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원인과 장래를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함께 수다 떨고 책 이야기를 나누고 일자리를 소개하기도 하고 속상했던 아르바이트 직장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맛난 음식을 대접해주고, 살뜰하게 반려묘를 돌본다. 그를 새롭게 이름붙일 이유가 특별히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병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인한 생활의 변화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시각장애인.

함께 지내온 세월만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충분치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와는 밤늦은 약속을 피하고, 우리 집을 나설 때 계단에서는 불을 켜주어야지. 그가 새로 재밌게 본 영화 이야기를 해 주면 기억해두었다가 영화를 찾아보듯, 새로 생긴 일상의 규칙들이 있다면 가능한 기억해서 그와 불편하지 않게 잘 지내봐야지. “아 맞다, 미안” 이 말을 여러 번 하게 될 것이 뻔하지만, 그이는 “아휴, 반달~”하며 너그러이 헤아려 주겠지. 그 동안 그래왔듯이.

4.

<어른이 되면> 영화 속 주인공 혜정 씨를 바라보며, 스크린이 주는 거리 덕분인지 그의 언니가 느끼는 답답함과 조급함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혜정 씨의 소망과 기쁨과 곤란함을 볼 수 있었다. 시설에서 지내던 발달장애 동생을 데리고 나와 함께 살기로 한 자매의 일상이 자리를 잡아가기까지 혼란과 갈등, 후회의 고개를 넘어왔겠지. 답답하고 당혹스럽고 신비하고 재미나고 행복하고, 또 어떤 심정으로 데려갈지 알 수 없을 터, 처음엔 서툴고 방황할 테고 온전하지는 않은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며 시도하며 살아가겠지.

스크린 안의 자매도 스크린 밖 나의 가족도 이웃도, 사람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누구도 해당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고, 우리의 일상과 하루가 ‘완전’할 수도 없다. 저쪽에 완전이 이쪽에 불완전이 있거나 이것이 정상, 저것이 비정상이라고 할 것이 있겠나 싶다.

5.

치매로 신경질이 늘었던 아버지에게 너무 많이 짜증을 냈던 것을 후회하며, 뇌졸중으로 우울해하던 어머니를 다그치고,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했던 날을 후회한다. 부끄럽다. 조금 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하지 못한 조카에게 미안해하며, 그래도 부재하는 부모보다는 존재하는 조카와 자식과 친구와 이웃에게 조금 덜 서툰 방법으로 조금 더 깊은 우정을 쌓아가려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모두 온전치 않다.

성질머리도, 몸뚱아리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일생이 온전한 적은 언제였던가? 나의 부모도, 나의 자식도, 나의 이웃도 친구도 우리는 서로의 온전하지 못함을 돌보고 때론 답답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하기 위한 기발한 생각을 해내고, 곁에 있고 싶어 한다. 장애인이 누구인지 따져 묻는 것이 필요한가? 갈라놓고 구별하려 드는 온전함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한가? 서로 온전치 못한 우리를 돌보고 아끼고 누구도 같지 않은 삶의 짐들이 있음을 헤아려주며 사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장애인 친구가 있냐는 물음은 잘못되었다. 나의 친구 모두 장애가 있고, 장애가 있는 내겐 친구가 있다.

2021년 6월 청소년, 빛글로 세상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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